[싱글몰트] 글렌모렌지 시그넷(Glenmorangie Signet)
글렌모렌지 시그넷
글렌모렌지의 자존심인 시그넷입니다. 적당한 고가, 예쁜 병, 호불호 갈리지 않는 맛으로 본인이 마실 용도로도, 선물용으로도 모두 사랑받는 녀석이에요.
이 위스키의 특별한 점은 맥아에 있습니다. 맥아 이야기를 하려면 위스키를 생산하는 과정에 대해 간단하게 이야기해야 하겠네요. 위스키는 크게 ‘싹 틔워서 분쇄하기 – 발효 – 증류 – 숙성 – 병입’의 다섯 단계를 거쳐 생산되는데, 여기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부분은 ‘싹 틔워서 분쇄하기’에 있어요.
맥아는 우리 말로 ‘엿기름’이고, 한자를 풀어보면 麥(보리 맥)+芽(싹 아), 말 그대로 싹 튼 보리에요. 스카치 위스키 증류소에서는 보리를 직접 재배하거나 사와서 맥아로 만드는데, 그 이유는 아밀레이스(=아밀라아제)를 활용하기 위해서입니다. 아마 지금 위스키에 관심 있어서 찾아오신 분들은 ‘아밀레이스’보다는 옛 발음인 ‘아밀라아제’가 훨씬 익숙한 세대에 속해 있겠죠?
ㅎㅎㅎㅎ 아무튼 아밀레이스는 여기서도 잘 알려진 역할, 즉 곡물 속의 전분을 소화하기 쉬운 단순한 당으로 분해해 주는 역할을 해요. 사람의 입 안에 있을 때는 밥을 씹을 때 단 맛이 나게 하는 그 역할이요. 이 아밀레이스는 곡식에 싹이 틀 때도 많이 생성되는데, 원래는 싹이 성장하면서 씨앗 속의 전분을 소화하기 쉽도록 만들어 주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위스키를 만드는 사람들은 아밀레이스로 분해된 이 당을 싹이(이 경우에는 맥아가) 스스로 성장하는 데 전부 써 버리기를 원치 않죠. 이 당을 효모가 먹고 알코올을 만들어 내기를 원해요. 그래서 당이 너무 많이 소모되기 전에 맥아를 건조시켜 싹을 죽입니다. 아밀레이스는 70도보다 높은 온도에서는 변성되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싹은 죽이면서 아밀레이스는 살릴 수 있는 55°C 근처에서 맥아를 건조시켜요. 그 후, 건조된 맥아를 분쇄하고 물과 효모를 더해 발효를 시작해요.
원래는요. 자, 말이 길었는데, 바로 여기서 시그넷의 독특한 점이 나옵니다. 원래는 위 과정, 즉 맥아를 분쇄하고 물에 섞는 과정에 건조된 맥아만 들어가는데, 시그넷을 만들 때는 여기에 ‘초콜릿 몰트’ 혹은 ‘커피 몰트’라고 불리는, 높은 온도에서 갈색이 날 때까지 바짝 볶은 맥아를 첨가해요. (초콜릿 몰트 이미지. 정말 초콜릿이나 커피같은 색이에요.) 원래는 어두운 색을 내는 맥주에만 사용되던 초콜릿 몰트를 처음으로 위스키에 사용한 제품이 바로 시그넷입니다. 맛에서도 이 초콜릿, 커피, 볶은 향이 아주 두드러집니다. 고소한 보리차 같은 향도 다른 위스키에 비해 훨씬 강하고요. 여러가지 원액이 섞인 만큼 다양한 향들도 조화로워요. 전체적으로 유명세에 걸맞게 맛있습니다. 이름값 하는 유명한 위스키가 생각보다 적은데, 시그넷은 이름값 하는 녀석들 중 하나입니다.
이 가격대에 워낙 쟁쟁한 경쟁자들이 많아서 이게 이 가격대 최고다!라고는 하지 못하겠지만요. 그리고 다른 위스키들이 그렇듯 얘도 워낙 면세가와 시중가가 많이 차이나는 편이라, 웬만하면 면세가로 사시는 걸 추천합니다. 면세점에 어지간하면 있는 인기제품이라 찾기도 어렵지 않아요. (시중가 40 내외, 면세가 180USD 내외)
정보
분류: 싱글 몰트 위스키
지역: 하이랜드, 스코틀랜드
숙성 캐스크: 아메리칸 버진오크, 셰리, 버번(+α)
테이스팅 노트
향: 놀랍게도 비행기 객실 냄새가 처음에 난다. 처음에는 이 향이 뭔가 했는데, 비행기 타면 나는 냄새라는 결론을 내렸다. 항공유가 섞인 약간 꿉꿉한 듯한 냄새. 불쾌한 향은 전혀 아니고, 금방 다른 향들이 치고 올라온다. 다크 초콜릿, 건포도, 바닐라, 레몬 껍질, 대추야자, 산도 높은 커피, 클로버 꿀, 절인 체리, 가죽, 은은한 매콤함.
맛: 산도 높은 커피, 다크 초콜릿, 볶은 보리가 가장 강하다. 절인 체리, 클로버 꿀, 생강, 자몽, 오렌지, 바닐라, 시나몬, 약간의 오크. 전체적으로 감칠맛이 조금 돌고 새콤하고 구수하다.
여운: 중간 길이. 보리차, 커피, 초콜릿. 약간의 민트, 오크, 매콤함.
(2020년 9월에 작성한 테이스팅 노트입니다.)
평점: 4/5
한줄평: 이름값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