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와인] 귀부 와인 이야기와 샤또 두와지 베드렌느 2003&1997(Chateau Doisy Vedrines 2003&1997)
샤또 두와지 베드렌느
오랜만입니다. 학생이다 보니 학기 중에 워낙 바빠서 술을 마셔도 글을 쓸 기회가 자주 없군요.
이번에는 바르삭Barsac 지방의 귀부 와인을 가져 왔어요. 소테른Sauternes/바르삭은 프랑스 보르도 좌안Left bank의 동네들인데(보르도를 가로지르는 '가론Garonne' 강 왼쪽에 위치), 양 쪽 다 '귀부' 와인으로 유명해 '소테른/바르삭'이라고 묶어 분류합니다. 샤또 디껨Chateau d'Yquem을 필두로 하는 소테른의 인지도가 훨씬 더 높아 바르삭도 그냥 '소테른'이라고 퉁치는 경우도 종종 있어요. 그래도 두 동네는 꽤나 떨어져 있답니다.
귀부 와인 이야기
방금 '귀부 와인'이라는 용어를 언급했는데, 여기에 관한 설명을 좀 할게요. 이 소테른/바르삭 지방에서 나는 와인들은 대부분 당도가 매우 높습니다. 거의 꿀이나 잼만큼 달아요. 이렇게 이 와인의 당도가 높은 이유는 '귀부병貴腐病'에 걸린 포도를 사용해 와인을 만들기 때문이에요.
아마 '병에 걸린 포도를 쓴다고?'라는 의아함이 고개를 들 겁니다. 병에 걸린 포도는 못 먹는 거 아닌가? 당연하잖아요.
사실 귀부병에 걸린 포도는 먹어도 됩니다. 이 포도로 만든 와인은 더더욱 먹어도 되죠.
그럼 이 귀부병은 대체 뭘까요? '귀부'는 프랑스어의 pourriture noble, 혹은 영어의 noble rot을 한문으로 직역한 것으로, 말 그대로 '貴귀하게 腐썩다'라는 뜻입니다. 한자는 '귀족' 할 때 그 '귀'자와 '부패'할 때 그 '부'자에요.
'썩다' 부분을 먼저 자세히 봅시다. '썩다'라는 말은 유기물, 특히 음식에 미생물이 번식해서 사람이 쓰지 못하게 되는 걸 말하죠. 그런데 귀부 와인을 만들 때는 딱 '적당히' 미생물이 번식한 포도를 사용합니다. 이 미생물은 Botrytis cinerea라는 곰팡이에요. 잘 익은 포도들을 집중적으로 공략하는 녀석들이에요. 위 사진에서 포도에 누렇게 피어있는 저 곰팡이요. 학명은 길고 어려우니 Botrytis, 보트리티스라고 줄여서 많이들 불러요.
이 곰팡이가 피어서 포도가 '적당히 썩으면' 포도의 껍질이 약해져 수분 증발이 빨라집니다. 그러면 포도가 건포도처럼 쪼그라들고 당도가 농축되겠죠. 그 포도로 와인을 만들면 바로 '귀부 와인'이 되는 겁니다.
그럼 '귀하다' 부분을 봅시다. 아니 그럼 아무 포도에나 저 곰팡이 피우면 되는 거 아니야? 안타깝게도 그게 되면 '귀한' 게 아니겠죠. 앞서 '적당히 썩으면'이란 표현을 썼는데, 이 '적당히' 썩히는 게 상당히 까다롭습니다. 곰팡이가 너무 번식해 버리면 정말 썩어 버리고, 곰팡이가 너무 안 피면 그건... 썩은 게 아니니까요.
이 곰팡이가 적당히 피는 데에는 기후가 절대적인 역할을 해요. 좋은 포도 산지의 조건들(적정 온/습도, 토질, 수질 등)에 더하여, 포도가 익어갈 무렵에 1)아침에는 곰팡이가 피기 좋도록 습하거나 안개가 끼고 2)오후에는 건조해지며 햇살이 내리쬐어 껍질이 약해진 포도를 말릴 수 있는 날씨. 이런 기후를 가진 와인 산지는 세계에 정말 몇 없어요. 제가 이름이나마 아는 곳도 열 군데도 안 되고, 아마 이보다 그리 많지 않을 거에요.
한술 더 떠서, 이 귀부병이 걸린 포도는 한 알 한 알 손으로 따요. 포도 한 송이 안에서도 곰팡이가 핀 정도가 불균일하고, 심지어는 한 알에서도 한 쪽은 적당히 썩어서 마르고, 한 쪽은 곰팡이가 없이 탱탱한 케이스도 종종 있다고 해요. 이런 반반인 녀석들도 반을 잘라 적당히 썩은 쪽만 와인 만드는 데 사용한다고 하네요.
극히 제한적인 공급, 한 땀 한 땀 들어가는 수작업까지. 왜 '귀한'지도 납득이 되셨나요?
앞서 언급한 대로, 귀부 와인 생산이 가능한 와인 산지는 매우 적어요. 가장 유명한 곳은 이 글에 등장하는 프랑스의 소테른/바르삭이고, 그 외에도 헝가리의 토카이Tokaj와 독일의 모젤Mosel과 라인가우Rheingau, 오스트리아의 바하우Wachau와 크렘스탈Kremstal 등의 지역이 있어요.
와이너리 이야기
이제 와이너리 이야기를 간단하게 해 볼게요. 샤또 두와지 베드렌느는 1704년에 설립되었고, 'Doisy' 가문에 1765년에 넘어가 1851년에 지금의 이름이 붙었다고 하네요. 소테른/바르삭의 다른 와이너리들과 마찬가지로 주로 세미용Semillon을 사용하고, 소비뇽 블랑Sauvignon Blanc과 무스카델Muscadelle을 약간씩 섞어 와인을 만들어요.
포도 재배 면적은 35헥타르(35만 제곱미터)로 샤또 디껨의 100헥타르의 1/3밖에 안 되는 정말 작은 크기군요. 본 제품과 세컨 와인(품질이 약간 낮고 더 싼 와인)인 Le Petite Vedrines, 드라이 와인인 DV 등을 모두 합쳐 연간 약 4만 병의 와인을 생산한다고 합니다. (출처: Union Grands Crus Bordeaux(보르도 그랑크뤼 연맹(?)))
이 와이너리는 1855년 보르도 분류 체계에서 2등급을 받았습니다. 소테른/바르삭 지방의 등급은 특1등급(Premier Cru Superieur), 1등급(Premiers Crus), 2등급(Deuxiemes Crus)의 세 개 등급만이 있고, 1855년 단 한 해에만 등급 분류가 이루어졌으니 1855년 이후에 생긴 와이너리들에는 등급이 없어요. 특1등급에는 샤또 디껨만이 속해 있고, 1등급에는 리외섹Rieussec, 기로Guiraud 등 총 11개 와이너리, 2등급에는 두와지 베드렌느, 필로Filhot 등 총 15개 와이너리가 속해 있어요.
180년 전에 분류된 등급이니 지금은 큰 의미는 없는 등급이긴 해요. 지금도 대장인 이껨만 제외하면요. 1등급이 꼭 2등급보다 좋다, 혹은 등급 없는 소테른보다는 등급 있는 게 좋다, 이런 건 이제는 없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그냥 등급 있는 와이너리들이 오래 된 곳들이구나, 정도만 알고 넘어가면 돼요.
이제 테이스팅 노트로 넘어갑니다.
정보
2003 14%/1997 13.5%
포도: 세미용(Semillon), 소비뇽 블랑(Sauvignon Blanc), 무스카델(Muscadelle)
지역: 바르삭, 보르도, 프랑스
2003 구매 정보: 와인앤모어 대청, 85000원(22년 10월)
1997 구매 정보: 와인앤모어 위례, 120000원(23년 7월)
2003 테이스팅 노트
향: 잡화꿀, 구운 빵, 버터스카치, 살구, 무화과, 오렌지, 전형적인 보트리티스 향(석유 같은).
맛: 아주 달고, 산도는 그렇게 강하지 않다. 꿀같이 진하고 끈적하다. 잡화꿀, 마멀레이드, 오렌지, 구운 빵, 버터스카치. 망고, 파파야와 같은 달콤한 열대과일 맛도 난다.
평점: 4/5
한줄평: 따스한 봄 햇살을 받으며 꽃밭을 마시다.
1997 테이스팅 노트
향: 버터스카치, 캐러멜, 버터, 브리오슈, 잡화꿀, 생강, 시나몬, 백후추, 정향, 오렌지 주스, 마멀레이드, 파인애플, 말린 무화과, 건포도, 딸기잼, 은은한 오크.
맛: 역시 당도는 매우 높고, 산도는 중간 정도. 매우 끈적하고 진하다. 브리오슈, 잡화꿀, 시나몬, 백후추, 정향, 마멀레이드, 딸기, 설탕에 절인 체리, 태운 설탕, 살구, 프룬, 건포도, 파인애플, 망고, 이스트, 브리 치즈, 잘 익은 사과. 고소하고 달콤한, 중독성 강한 맛이다.
평점: 4.25/5
한줄평: I can drink this all day